앉을 자리가 귀해진 시대
앉을 수 있는 자리는 사치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한꺼번에 밀려 들어온다. 시선은 앞쪽 좌석에 꽂혀 있다. 앉을 수 있을까. 이미 누가 앉았을까. 순간적으로 계산이 시작된다. 빈자리는 몇 개, 서 있는 사람은 몇 명, 그리고 나의 순서는…?
그 몇 초의 눈치싸움. 지금의 도시는 거기서부터 하루가 시작된다.
자리는 단순한 의자가 아니다
지하철 좌석은 단지 앉는 공간이 아니다. 그건 ‘조금이라도 덜 피로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권리’다. 이른 새벽부터 나왔거나, 어젯밤 늦게까지 일했거나, 혹은 단순히 너무 지친 사람에게는 그 몇 정거장의 앉음이 오늘 하루를 지탱할 유일한 휴식일 수도 있다.
그래서 자리를 둘러싼 눈빛에는 절박함이 묻어 있다. ‘앉고 싶다’가 아니라, ‘앉아야 오늘 하루가 버틸 만 하다’는 말 없는 요청. 하지만 좌석은 한정되어 있고, 속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빈자리 앞에 선 사람들의 복잡한 심리
가끔은 앞에 자리가 비었는데도, 누군가는 망설인다. 앉아도 되는 걸까? 혹시 누군가가 더 피곤한 건 아닐까? 나보다 나이 많아 보이는 사람이 오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사이, 누군가는 과감하게 앉는다. 그 선택 앞에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수없이 많은 생각이 오간다. ‘아, 나도 앉을걸…’, ‘저 사람은 배려라는 걸 모르는 걸까?’, ‘그래, 어쩌면 그 사람도 사정이 있었겠지.’
도시인은 감정을 밖으로 꺼내기보단, 속으로 눌러 담는 데 익숙하다.
양보와 체념 사이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건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가끔은 그마저도 버겁다. 몸이 아픈데도 괜찮은 척, 다리가 저려도 모른 척. 양보는 미덕이지만, 피로한 사람에게는 체념이 되기도 한다.
‘양보해야 하는데…’ ‘근데 오늘은 너무 힘들다.’ ‘죄책감 느끼지 않기 위해, 그냥 눈을 감자.’ 그 침묵 속의 눈 감음은 비겁함이 아니라, 지친 사람의 자기보호일지도 모른다.
앉는 순간, 잠이 쏟아진다
앉으면 거의 모두가 고개를 숙인다. 바로 잠에 들기도 하고, 눈은 떴지만 정신은 닫아버리기도 한다. 그건 일종의 항복이다. ‘조금만 쉬자, 진짜 잠깐만…’ 지하철 좌석은 그래서 작은 피난처가 된다.
누군가의 몸이 비스듬히 기울어질 때, 그 피로감이 내 어깨에 닿는다. 나는 어깨를 세운다. 그 무게를 살짝 받아준다. 묘하게 그런 순간이 싫지 않다. 그건 타인에 대한 무언의 동의이자, 연대다.
그 자리를 떠날 때, 우리는 다시 싸움으로 돌아간다
내릴 역이 가까워져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 사람들의 시선이 옆으로 움직인다.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작은 경쟁이 다시 시작된다. 그 시선엔 기대와 조심스러움, 그리고 단념이 섞여 있다.
그건 싸움이라기보단, 도시의 질서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리듬에 가깝다. 서로 말은 없지만, 그 안엔 분명히 ‘사람’이 있다. 그 사소한 움직임조차도, 인생이라는 거대한 피로 속에서 만들어진 ‘작은 감정의 파동’이다.
그리고 오늘도, 앉지 못한 채 내린다
지하철이 멈추고, 문이 열리고, 나는 서 있는 채로 내린다. 앉지 못했지만 괜찮다. 이제는 익숙하다. 나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앉지 못한 자리에 대한 아쉬움을 하루라는 싸움 속으로 다시 끌고 간다. 어쩌면 그 앉지 못한 몇 분의 피로가 오늘의 분노, 오늘의 침묵, 오늘의 무표정을 만들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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