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약자석에 앉던 날,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
지하철 노약자석. 늘 그 자리는 ‘남의 자리’였다. 내가 앉아서는 안 되는 자리, 앉지 말아야 한다고 배운 자리였다.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그 자리가 비어 있어도 나는 절대 거기에 앉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눈길을 주는 것조차 어떤 금기를 깨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날, 나는 그 자리에 앉았다
어느 날, 평소처럼 출근시간을 피한 낮 시간. 지하철은 비교적 한산했고, 노약자석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나는 평소처럼 맨 끝칸으로 향했다. 자리가 모두 차 있었고, 그 붉은색 천으로 덮인 네 칸이 덩그러니 비어 있었다.
잠시 망설였다. 그런데 그날은 유난히 허리가 아팠다. 무릎도 시큰거렸다. 무릎 위에 들고 있던 가방도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붉은 좌석에 앉았다.
“이제, 앉아도 되는 나이인가요?”
앉자마자 마음이 불편했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했다. 나를 ‘노약자’로 바라볼까 봐, 혹은 ‘아직 젊은 사람이 왜 앉아있지?’ 할까 봐.
하지만 곧 깨달았다. 내가 지금 느끼는 통증과 숨소리, 오늘 아침 버거웠던 계단, 모든 것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제, 앉아도 되는 나이가 되었다.” 그 사실이 서늘했다.
객차 안은 변함없는데, 나는 변했다
노약자석에 앉아 바라본 객차 안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고개 숙인 사람들, 창밖을 멍하니 보는 사람들, 휴대폰을 빠르게 넘기는 손가락들.
하지만 그날,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시선은 달랐다. 나는 그 공간 속에서 가장 느린 존재가 되어 있었다.
한때 나도 저렇게 빠르게 걸었고, 서서 책을 읽었고, 앉지 않아도 괜찮았다.
노약자석은 누군가의 ‘도착점’이다
그 자리는 단지 몸이 불편한 이들이 앉는 자리가 아니다. 그건 어느새 인생이 방향을 바꾼 사람의 자리다.
속도를 내던 걸음에서 속도를 조절하는 걸음으로. 앞서 나가는 삶에서 뒤를 돌아보는 삶으로.
그 자리에 앉는 건 늙음이 아니라 멈춤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무심한 도시 속, 나는 오늘만큼은 부드럽고 싶었다
객차 안은 무표정한 도시인의 표본처럼 서로를 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안에서 오랜만에 ‘나’를 들여다봤다.
잠시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무릎 위 가방이 유독 무겁게 느껴졌지만, 마음만큼은 오늘 따라 조금은 가벼워졌다.
그 자리에서 생각한 것들
살면서 우리는 언제 무언가를 포기하고, 또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걸까.
노약자석에 앉는 일은 물리적 선택 같지만 사실은 인생에 대한 수긍이다.
예전 같으면 서서 갈 힘이 있었지만, 지금은 앉아야 버틸 수 있다. 그건 나약함이 아니라 용기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내리기 전, 잠시 몸을 일으킬 때 누군가 내 옆 노약자석에 조심스레 앉았다. 나와 비슷한 연배, 혹은 나보다 조금 더 아픈 사람.
그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서로에게 말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건 “이제 우리, 여기에 앉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군요.” 라는 작은 인사의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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