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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잠시 쉬었다 가세요.

‘노약자’라는 단어가 나를 향할 때

by 갈지로 2025.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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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이 내 이름처럼 들리던 순간, ‘노약자’

노약자. 그 단어는 오랫동안 나와는 상관없는 단어였다. 기차역이나 엘리베이터에서 ‘노약자 우선’이라는 안내문을 봐도 그저 다른 누군가의 몫이라 여겼다.

지하철 노약자석도 마찬가지였다. 그 자리는 늘 내가 비켜줘야 할 자리였고, 내가 지켜야 할 예의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단어가 조용히 나를 향했다. 아무도 직접 말하지 않았고, 어떤 경고도 없었지만 나는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

노약자
노약자

 

몸은 먼저 알고 있었다

숨이 차오르는 속도가 빨라졌고 아침 기상 후 허리 근육이 뻣뻣해졌다. 무거운 가방은 점점 더 무겁게 느껴지고 계단보다 에스컬레이터를 찾는 일이 잦아졌다.

병원 대기실에서는 의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연령상, 관절염이 자연스러운 시기입니다.” 그 말 한마디가 전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저 피곤한 것뿐이다’라고 넘겼다. 그게 자기방어였다는 걸 이제는 안다.

처음 노약자석에 앉았던 날

몸이 힘들어 비어 있는 노약자석에 앉았다. 그 순간, 주위의 시선보다 더 불편했던 건 내 안에서 울린 한 문장이었다.

“나는 이제, 노약자인가?”

말에 가시가 박혀 있었다. 단어 하나가 이렇게 낯설고도 아플 줄 몰랐다.

‘노약자’라는 단어는 단순하지 않았다

그 말은 단지 ‘늙고 약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 속엔 ‘이제 예전처럼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침묵의 정의가 숨겨져 있다.

노약자란, 사회가 보호해야 할 대상이지만 동시에 일정한 거리감이 유지되는 존재다. 안내문 속에서, 방송 멘트 속에서, 우리는 그 단어를 ‘나 아닌 누군가’로 외면해 왔다.

하지만 이젠 그 단어가 조금씩 내게 다가오고 있다. 무게를 실어 가슴에 얹힌다.

거울을 보는 일이 두려워졌다

아침마다 세수를 마치고 거울을 보면 예전의 얼굴이 아니라 어딘지 낯선 사람이 서 있다.

이마에는 주름이 깊어졌고, 눈 밑에는 피로가 잔류한다. 그 모습이 ‘노약자’라는 말을 현실로 느끼게 만든다.

나는 여전히 내 마음만은 젊다고 생각했는데 거울 속 현실은 이미 먼 길을 먼저 걸었다.

그 단어를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다

처음엔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 단어는 ‘패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젊음이 사라졌다는 선언 같았고, 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난 표식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생각이 달라졌다. 노약자란 단어는 ‘약해졌으니 이제 쉬어도 된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

쉼 없이 달리기만 했던 내게 이제는 잠시 앉아도 괜찮다는 사적인 허락.

나를 위한 자리에 앉는 용기

이제는 비어 있는 노약자석을 보면 가끔은 먼저 앉는다. 누군가 보기엔 그저 앉아 쉬는 한 사람일 뿐이겠지만 내게 그 자리는 자신을 인정하는 용기의 자리다.

몸이 변했고, 마음도 그에 따라 조금씩 가라앉는 중이다. 하지만 그건 나약함이 아니라 세월을 받아들이는 방식일 뿐이다.

이 단어가 완전히 내 것이 되기까지

아직도 가끔은 노약자라는 단어에 거리를 둔다. 마음은 여전히 인정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몸은 솔직하고, 하루하루는 똑똑하게 나를 설득해간다.

아마 언젠가는 그 단어를 더 자연스럽게 껴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노약자석에 앉는 일이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그 자리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이젠, 내 삶도 조금은 천천히 흘러가도 괜찮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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