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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잠시 쉬었다 가세요.

비어 있는 자리는 늘 비어 있지 않았다.

by 갈지로 2025.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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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리가 남긴 시간의 흔적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노약자석이 비어 있길래 앉았다.” 그 말은 맞는 말이다. 형식적으로, 물리적으로, 실제로 그 자리는 비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 처음 앉던 날 그 빈자리에서 무언가 묵직한 것을 느꼈다. 비어 있는 것 같은데, 전혀 비어 있지 않은 자리. 그곳은 누군가의 숨결이, 누군가의 쉼표가, 누군가의 마지막이 스며든 곳이었다.

노약자석
노약자석

빈 자리에 남은 것들

처음으로 노약자석에 앉고 나서야 나는 그 자리가 단순한 ‘의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등받이에 살짝 눌린 형상, 천 위에 묻은 시간의 먼지, 때로는 묻어나 있는 약 냄새. 그 자리는 그저 누군가 앉았다가 떠난 자리가 아니었다. 그 자리를 스쳐간 수많은 사람의 인생이 보이지 않게 눌어 있었다.

지하철은 달리고, 사람들은 내리고, 그 자리는 늘 다시 비워지지만 그 안에 남아 있는 건 그리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 자리에 먼저 앉았던 얼굴들

생각해보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이들을 꽤 자주 봐 왔다. 허리가 굽은 할머니, 지팡이를 쥔 노인, 어깨가 한쪽으로 기운 할아버지. 때로는 아내의 부축을 받으며 말없이 앉아 있던 노인의 모습도 있었다.

그들 모두 그 자리를 절박하게 필요로 했고 그곳에서만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나에겐 눈으로 스쳐 지나간 한 장면이지만 그들에겐 하루를 버틸 수 있게 해준 유일한 공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모든 얼굴들이 빈자리 위에 투명한 그림자처럼 겹쳐졌다.

나는 지금 그 자리를 이어받은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문득문득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자리도 사실은 수많은 이의 ‘기억’ 위에 놓여 있다는 걸.

노약자석이란 이름 자체가 어떤 종류의 고단함을 이미 내포하고 있다. 질병, 나이, 피로, 약함… 그 무게를 잠시 내려놓기 위해 마련된 공간.

그래서 나는 그 자리를 함부로 여기지 않기로 했다. 그저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살아 있는 동안 가장 고요하게 머물렀던 공간이라는 걸 기억하기로 했다.

비어 있는 자리는 누구의 것이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지하철 어딘가에서 그 자리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한때 그 자리에 앉아 창밖을 보며 ‘다음 역은 어디일까’ 조용히 되뇌던 노인은 지금은 더 이상 지하철을 타지 못할 수도 있다.

그 자리를 떠났다는 의미는 단지 하차했다는 게 아니다. 어쩌면 세상 자체에서 ‘다음 역’이 없어진 걸 수도 있다.

자리란, 결국 삶의 흔적이다

어떤 공간이든 누군가가 오랫동안 머문 자리는 그의 온도와 체온을 남긴다. 노약자석도 마찬가지다.

그곳에 남겨진 건 단순히 눌린 방석이나 낡은 천이 아니다. 그곳에는 살아온 세월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세월 위에 내가 또 앉아 있다.

다음엔 누가 이 자리에 앉게 될까

지금은 내가 필요해서 앉는 자리지만 언젠가 내 몸이 조금 더 굽고 말수가 줄어들고 한 손으로 가방을 들기 어려워지면 이 자리는 더욱 절실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엔 또 다른 누군가가 이 자리에 앉게 되겠지. 그때, 그 사람도 나처럼 생각할까. “이 자리가 정말 나를 위한 자리일까?” “이 자리는 누가 먼저 앉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 자체가 삶을 한 바퀴 돌아왔다는 뜻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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