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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잠시 쉬었다 가세요.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칸 – 익숙함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기적

by 갈지로 2025.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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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하루 속, 같은 칸에서 만나는 특별함

오전 7시 52분. 지하철 4호선 당고개 방면 열차. 나는 오늘도 똑같은 시간에, 같은 칸의 같은 문 근처에 서 있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냥 처음 입사하던 날 우연히 잡은 자리가 편했고, 그게 반복되다 보니 루틴이 되었다. 별일 없으면 이 자리는 내 자리다. 나만 그런 건 아니다. 같은 시간대, 같은 칸, 같은 얼굴들이 있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모른다. 하지만 어딘가 안다. 누군가는 늘 미간을 찌푸린 채 휴대폰 화면을 보고 있고, 누군가는 눈을 감은 채 정차역을 정확히 맞춰 일어난다. 젊은 커플은 늘 손을 잡고 타며, 어떤 노인은 신문을 단정히 펼친다. 아무 말 없이, 같은 시간에 만나고, 같은 자리에 선다.

지하철 안
지하철 안

루틴이라는 이름의 안도감

일상이 루틴으로 굳어진다는 건 흔히 지루함의 다른 이름으로 통한다. 하지만 어쩌면 그건 안도감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 시간, 이 자리에서는 변수가 없다. 세상이 얼마나 복잡하고 뒤죽박죽이어도, 이곳만은 항상 같다. 일종의 ‘작은 질서’다.

 

특히 요즘처럼 불확실한 세상에서, 이 작은 질서는 의외의 위안을 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똑같은 사람들이 같은 자세로 스마트폰을 보며 이동하는 풍경. 그것만으로도 마음 한편이 진정된다.

그리고, 가끔은 우연히 기적이 피어난다

그 익숙한 반복 속에서도 아주 가끔, 의외의 장면들이 피어난다. 몇 주 전, 늘 같은 자리에 앉던 청년이 누군가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그 옆에 앉아 있던 여성은 처음엔 당황했지만, 곧 미소를 지었다. 다음날부터 둘은 나란히 앉았다.

 

또 어떤 날은 노인이 휴대폰을 떨어뜨렸고, 맞은편 청년이 재빠르게 주워 건넸다. 노인은 고맙다는 말 대신 짧게 웃었다. 웃음은 그렇게 번졌다. 그건 짧은 순간이었지만, 사람들 표정이 아주 잠깐 달라졌던 시간이었다.

 

그건 기적이라 부를 만큼 거창하진 않지만, 분명히 ‘이상한 온기’였다. 익숙함 속에서 예고 없이 피어난, 작고도 선명한 장면. 그걸 목격한 나는 그날 하루를 다르게 보냈다. 세상은 아직 괜찮다고 믿을 수 있었던 날이었다.

습관이 만들어낸 관계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처음엔 배경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어느새 ‘풍경의 일부’가 된다. 더 나아가면, 내 일상의 일부가 된다. 그들이 그 자리에 없는 날, 나는 잠깐 낯선 세계에 떨어진 기분이 든다.

 

지하철이라는 공간은 말을 섞지 않아도 관계를 만들어낸다. 이름 모르는 사람들과 매일 같은 칸에서 20분을 함께 보내다 보면, 우리는 서로 모르게 서로를 지켜보게 된다. 아픈 듯 보이면 걱정이 되고, 오늘 표정이 밝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익숙함을 무시하지 마라

일상은 반복된다. 지루하고, 변화도 없다. 하지만 바로 그 안에 진짜 ‘사람’이 있다. 우리는 낯선 군중 속에서, 익숙한 얼굴을 통해 이 세계와 자신을 잇는다. 그 익숙함은 정체가 아니라, 뿌리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칸. 어떤 사람에겐 지루함이고, 어떤 사람에겐 생존이고, 어떤 사람에겐 희망이다. 반복은 변화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서 조금씩 연결된다.

그리고 내일도 같은 칸에서

내일도 나는 같은 시간, 같은 칸에 설 것이다. 그 자리에는 또 그 얼굴들이 있을 것이다. 새로운 일이 생기든, 아무 일도 없든, 그 익숙함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그 평범한 칸에서 또 다른 기적이 피어날지도 모른다. 나는 그 가능성을 믿는다.

어쩌면 삶은, 거창한 전환점이 아니라, 매일 똑같은 곳에서 시작되는 작은 순간의 축적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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