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소음 사이로 스며든 아이의 웃음
아침 8시 16분. 출근길 지하철은 언제나처럼 과묵하다. 피곤함이 묻어나는 얼굴들, 눌린 눈두덩이, 서로를 보지 않으려는 시선들. 기계음만이 규칙적으로 흐르고, 그 속도에 맞춰 사람들의 숨소리마저 정제된 듯하다.
그날도 그랬다. 모두가 침묵 속에서 하루를 준비하던 순간, 열차 안을 가르는 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작은 아이의 웃음소리. 맑고 가벼운, 그렇지만 공간 전체를 파고드는 힘을 가진, 그런 소리였다.
순간, 공기가 바뀌었다
웃음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터졌다. 엄마 품에 안겨 있던 두세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무언가에 깔깔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웃음은 누구도 방어할 수 없는 종류였다. 억지스럽지 않았고, 일부러 내는 소리도 아니었다. 자연스러웠고, 깨끗했고, 완전히 자유로웠다.
그 한 번의 웃음으로 공기가 바뀌었다. 굳어 있던 사람들의 눈이 고개를 들었고, 입가가 아주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미소를, 누군가는 조용한 한숨을, 누군가는 그냥 숨을 들이켰다. 마치 그 웃음이 사람들의 굳은 표정 틈으로 스며들어, 조용히 문을 두드리는 듯했다.
도시의 속도 속에서 발견된 느린 생명력
아이의 존재는 도시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 너무 느리고, 예측할 수 없고, 제멋대로니까. 하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소중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감정, 잊어버린 리듬, 밀어낸 본능을 아이들은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날, 아이는 계속 웃었다. 작은 장난감을 떨어뜨리고, 주우려다 실패하고, 그게 재밌어서 웃고, 또 웃었다. 엄마는 조용히 달래려 했지만, 아이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열차 안 그 누구도 그 웃음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작은 생명 하나가 가진 진동력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앞좌석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의 반응이었다. 처음엔 짜증 섞인 눈으로 아이를 흘겨봤지만,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그 표정의 변화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지만, 나에겐 또렷했다. 사람은, 누구나 결국 감정이 있는 존재였다.
아이의 웃음은, 도시가 잊고 있던 어떤 감정을 깨우는 자극이 되었다. 빠르게 지나가던 아침의 시간 속에서, 아주 잠깐 모든 것이 느려졌다. 그리고 그 느림이 사람들에게 여백을 주었다. 감정을 숨겨야만 하던 어른들이, 아이 덕분에 잠시 그 얼굴을 풀 수 있었다.
웃음은 결국, 전염된다
열차가 어느 역에 멈췄을 때, 아이는 엄마의 손을 잡고 내렸다. 사라지는 그 작은 뒷모습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다시 각자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여운은 남았다. 웃음은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공간에 오래 머물렀다.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가 감정을 잃은 것이 아니라, 보여줄 용기를 잃은 것은 아닐까. 웃음은 그렇게, 누군가의 마음을 두드릴 수 있는 파동이었다. 그 시작이 단 한 명의 아이였다는 것이, 내겐 참 놀라웠다.
감정은 숨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우리는 도시에 맞춰 감정을 접는다. 출근길에는 피곤해도 웃지 않고, 힘들어도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한다. 하지만 그 날 나는 배웠다. 감정은 숨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누면 괜찮아지는 것이기도 하다는 걸.
아이의 웃음은 우리 모두가 내면 깊숙이 잊고 있던 '감정의 언어'였다. 그 언어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솔직한 마음 하나면 충분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 후로 지하철에서 웃음소리를 들을 때면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것이 아이의 것이든, 친구끼리의 대화 속이든, 혹은 누군가의 혼잣말이든. 그건 어쩌면, 이 도시 속에서 가장 인간적인 순간일지도 모른다.
도시는 빠르지만, 감정은 느리다. 그 느림이 사라지지 않도록, 웃음이 들리는 방향을 따라가본다. 그곳엔 아직 살아 있는 감정이, 사람다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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