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에 비친 나의 초상 – 지하철에서의 짧은 고백
지하철이 긴 터널 구간을 지날 때면, 창문은 더 이상 ‘밖’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검은 유리처럼 변해버린다.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 나는 창문에 비친 나를 마주한다. 조금 흐릿한 윤곽, 생기가 덜 깃든 얼굴, 나도 모르게 지어버린 익숙한 표정.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것들이 차례로 드러난다.
지하철 창문은 때때로 거울보다 더 정직하다. 거울 앞에서는 ‘내가 보고 싶은 나’를 만든다. 자세를 고치고, 표정을 다듬고, 눈빛을 의도한다. 하지만 지하철 창문 앞에서는 그런 꾸밈이 사라진다. 무심한 시선으로 창밖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마주하게 된다.
도망치고 싶던 얼굴
한 번은, 무심코 창에 비친 내 눈을 본 적이 있다.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눈동자였다.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눈빛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무표정해졌을까. 언제부터 감정을 위장하는 게 일상이 됐을까.
그건 피로일 수도 있고, 습관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얼굴을 오래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눈을 돌렸다. 하지만 돌린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나란 사람은 여전히 거기 있었다. 어두운 창 속에서, 나를 꿰뚫는 시선으로.
침묵 속의 대화
지하철 창문은 말을 하지 않는다. 대신 질문을 던진다. "요즘, 괜찮은가요?", "그렇게 사는 게 맞다고 생각하나요?", "이대로 계속 갈 수 있겠어요?" 그건 누군가 대신 해줬으면 했던 질문들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묻지 않기에, 스스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창 속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더 크게 다가왔다. 언어로는 감히 끄집어낼 수 없는 감정들이 그 침묵 안에 있었다. 후회, 미련, 혼란, 두려움, 그리고 아주 희미한 희망. 그 모두가 내 얼굴 안에 녹아 있었다.
어둠은 숨김이 아니라 드러냄이다
사람들은 어둠을 숨는 공간이라 말한다. 하지만 나는 지하철의 어둠을 ‘드러냄’이라 느꼈다. 밝은 낮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어두운 창에선 또렷해진다. 빛이 없기에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그림자들. 그것들이 비로소 얼굴을 드러낸다.
지하철이라는 터널은 현실과 내면 사이의 짧은 통로처럼 느껴진다. 바깥세상은 여전히 바쁘고 시끄럽지만, 이 안에서는 잠깐, 멈춰서서 자신을 볼 수 있다. 그건 약간 아프고, 약간 고맙다.
창문에 묻은 나날들
한 칸 안에는 수많은 얼굴들이 반사되어 있다. 학생, 직장인, 노인, 연인, 혼자 있는 사람들. 그들 각자에겐 각자의 터널이 있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어둠. 그리고 누구도 대신 볼 수 없는 창 속의 얼굴.
나는 자주 창문을 통해 그런 얼굴들을 본다. 그들의 시선은 흩어지고, 감정은 가려져 있지만, 이상하게도 무언가 느껴진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심. 그것이 같은 창문 위에 남는다. 어쩌면 지하철의 창문은 단순한 유리가 아니라, 우리 각자의 시간을 담아두는 ‘투명한 일기장’일지도 모른다.
빛이 들어올 때, 우리는 다시 가린다
열차가 터널을 벗어나 역에 가까워지면, 창밖에는 다시 바깥 풍경이 나타난다. 광고판, 벽, 조명, 그리고 사람들. 그 순간, 창 속의 나도 사라진다. 우리는 다시 현실로 돌아간다. 다시 '사회적인 나'로 복귀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방금 전 그 어둠 속, 나는 조금 더 내게 가까워졌다. 가끔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하루가 달라지기도 하니까. 어둠을 피하지 않고 마주할 수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조금 가벼워졌다.
창을 통해, 나를 보다
지하철의 창문은 무심한 것 같지만, 아주 깊은 곳까지 닿는다. 그것은 바깥을 비추지 않고, 우리 안쪽을 비춘다. 그 안에는 우리의 지친 모습도, 감춰온 생각도, 미처 꺼내지 못한 감정들도 있다. 모두 창에 묻어 있다.
그 사실을 기억한다면, 지하철에서 보내는 몇 분이 조금 다르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 짧은 어둠 속에서 우리는 다시 자신을 확인하고, 내일을 준비한다. 말없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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