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약자석에 처음 앉던 순간의 낯섦
지하철 노약자석. 수십 년 동안 그 자리는 내게 ‘금기’였다. 비어 있어도, 발이 아파도, 허리가 욱신거려도 나는 절대로 그 자리에 앉지 않았다. 앉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자리는 누군가의 ‘필요’에 의해 비워둬야 하는 곳이라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비가 내리던 늦봄의 오후.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하던 길이었다. 발목은 아침부터 욱신거렸고, 오른쪽 무릎은 계단을 오를 때마다 조용히 울렸다. 평소 같았으면 참고 일반석에 섰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노약자석 쪽 좌석 하나가 조용히 비어 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잠시 멈췄다. 머뭇거렸다. 그렇게 몇 초가 지났다.
그리고 나는 앉았다. 처음으로, 그 자리에.
조용한 낯설음
앉자마자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정이 가슴 속 어딘가에서 올라왔다. 의자에 등을 붙이고 앉았지만 등줄기로는 묘한 긴장이 흘렀다.
혹시 누가 나를 이상하게 보진 않을까? “저 사람, 아직 젊어 보이는데 왜 저기 앉았지?” 그런 속삭임이 있는 건 아닌가. 주변을 조심스레 둘러봤지만 아무도 나를 보지 않고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그 자리에서 오직 나 혼자, ‘이제 나는 앉아도 되는 나이구나’라고 속으로 되뇌고 있었던 것이다.
앉을 수 있다는 건, 앉아야만 하는 나이가 되었다는 뜻
처음 그 자리에 앉았던 그날, 나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어떤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젊을 땐, 그 자리에 앉지 않는 것이 예의였지만 이제는 그 자리에 앉는 것이 내 몸을 지키는 방법이 되었다.
무릎은 더는 참아주지 않았고, 허리는 자꾸만 중심을 잃는다. 숨소리는 예전보다 조금씩 거칠어졌고 발끝은 종종 저릿하다.
그 모든 변화가 말해주는 것이다. “당신은 이제, 앉아도 됩니다.” 그 말이, 그렇게 씁쓸할 줄은 몰랐다.
내가 앉자, 주변이 달라졌다
노약자석에 앉아 있으니 객차 안의 모든 풍경이 이전과는 다르게 보였다. 창밖이 더 멀게 느껴졌고 사람들의 발걸음은 더 빠르게 지나갔다. 내가 세상의 흐름에서 살짝 비켜나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자리는 단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이 담긴 자리였다. 한때는 부모님이 앉았던 자리, 그 이후에는 내가 양보했던 자리, 이제는 내가 앉는 자리.
세월은 그렇게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누군가에게 양보받는 존재가 된다.
앉는 순간, 나도 모르게 회상하게 된다
그 자리에 앉자, 젊은 날의 어느 장면들이 떠올랐다. 서서 음악을 들으며 퇴근하던 밤, 무릎에 아이를 앉히고 탄 어느 아버지의 얼굴, 노약자석에 앉은 노인을 바라보며 “나는 저 나이가 되어도 저렇게 되진 않을 거야.” 라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던 어느 날.
그 말은 이제 부끄럽다. 그 나이가 되어 보니 그 말이 얼마나 경솔하고 가벼웠는지 알겠다.
노약자석은 ‘종착지’가 아니다
그 자리에 처음 앉았던 날, 나는 ‘종착지’에 도착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곧 알게 되었다. 노약자석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의 자리다.
더 이상은 젊음을 기준으로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조금 느려도 괜찮은, 자신을 더 돌보며 살아야 하는 시기의 시작.
그 자리에서 앉았을 뿐인데 마음속에서는 새로운 문이 하나 열렸다.
내일도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그날 이후로, 지하철에 오를 때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노약자석을 바라본다. 앉을 수 있을 만큼 피곤한 날도 있고 괜찮은 날도 있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 자리 앞에서 잠시 멈칫한다. 나는 여전히 ‘앉는 사람’과 ‘비켜 서 있는 사람’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다.
그 자리엔 몸보다 마음이 먼저 앉아야 한다는 걸 요즘 들어 자주 느낀다.
📌 함께 읽으면 좋은 글
이어폰-속으로-숨어버린-도시
'인생-잠시 쉬었다 가세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약자석에서 바라본 인생-빈자리보다 무거운 자리 (8) | 2025.08.28 |
---|---|
노약자석-젊은 사람들은 그 자리를 바라보지 않는다. (3) | 2025.08.27 |
노약자석-앉아 있어도 불편한 자리 (7) | 2025.08.25 |
‘노약자’라는 단어가 나를 향할 때 (3) | 2025.08.24 |
비어 있는 자리는 늘 비어 있지 않았다. (2) | 2025.08.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