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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옆자리의 노인 – 늙음이라는 시간의 속도

by 갈지로 2025.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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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내 한 칸 사이, 세월의 무게를 지닌 사람과 나

지하철에 앉아 있던 어느 날, 내 옆에 천천히 걸음을 옮긴 노인이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동작 하나하나에 시간이 묻어 있었다. 허리를 숙일 때도,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을 때도, 숨을 고를 때도. 젊은 사람이라면 한 번에 끝낼 동작들이 그에게는 세 번의 호흡이 필요해 보였다.

 

나는 그분을 본다. 하지만 그분은 나를 보지 않는다. 아니, 보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익숙하지 않은 공간 속에서 자신의 속도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이 내게 묘하게 낯설고도 익숙하다. 도시 속에서 보기 힘든 '느림'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하철 옆 자리 노인
지하철 옆 자리 노인

늙음이란 느림인가

도시의 시간은 빠르다. 출근 시간, 열차 간격, 엘리베이터 도착 버튼, 택배 도착일. 모두가 ‘속도’를 기준으로 움직인다. 그런 속도에 익숙해진 우리는 ‘느림’을 불편해한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천천히 걷는 노인을 보면 조바심부터 난다. 말없이 ‘서두르라’고 눈빛을 던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날, 내 옆자리의 노인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천천히 있었다. 그 느림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했다. 도시의 리듬과 다르게, 그분은 자신의 시간에 맞춰 숨 쉬고 움직였다. 그것은 늙음의 결과이자, 삶의 기술이었다.

기억의 주름, 손끝의 시간

나는 그 노인의 손을 보았다. 굵은 핏줄, 약간 휘어진 마디, 반듯하게 다문 손끝. 그 손은 수십 년을 견디며 만들어진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젊은 손과는 다르게, 그 손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것을 들고, 얼마나 많은 것을 놓았을까.

 

지하철은 지금 시속 수십 킬로미터로 달리고 있었지만, 그분의 존재 하나가 나를 멈추게 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속도를 점검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 너무 빠르진 않은가? 내가 지나친 것들 중에는, 혹시 다시 볼 수 없는 것이 있진 않았을까?

침묵은 세월을 닮는다

그 노인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옆에서, 세상 누구보다 많은 이야기를 들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말이 필요 없는 순간. 그건 나이를 먹어본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공기였다. 어떤 종류의 평온, 어떤 종류의 무게. 그것이 침묵으로 전해졌다.

 

도시는 말이 너무 많고, 너무 빠르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말하지만, 정작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노인의 침묵은 달랐다. 그는 말없이 존재했고, 그 존재 자체가 충분한 ‘이야기’였다.

지하철이라는 시간의 다리 위에서

지하철은 젊은이와 노인을 같은 칸에 태운다.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 하지만 속도와 시간은 같지 않다. 젊은 사람의 시간은 앞으로 흐르고, 노인의 시간은 돌아보며 흐른다. 그 둘이 나란히 앉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건, 묘하게 아름답다.

 

나도 언젠가는 저 자리에서 누군가의 옆에 앉게 되겠지. 지금은 옆자리의 노인을 관찰하고 있지만, 그날이 오면 나는 어떤 모습일까. 조금은 천천히 살아가는 법을, 그분처럼 품위 있게 배울 수 있을까.

내릴 역이 가까워지면

열차가 종착역 가까이에 도착하자, 그 노인은 다시 천천히 가방을 들고, 조심스레 일어섰다. 무릎을 누르고 일어나는 데도 시간이 걸렸고, 손잡이를 잡는 데도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누구도 재촉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간이 자연스럽게 비켜졌다.

 

그건 도시의 예외적인 순간이었다. 모두가 빠르기를 강요받는 이곳에서, 한 사람이 '자연스레 늦을 수 있는 시간'을 누리는 장면. 거기엔 묘한 존중과 고요함이 있었다. 삶이 그에게 허락한 속도, 그것을 주변도 받아들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앉은 채로 배웠다

노인이 내리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말 한마디 없던 그 옆자리는, 이상하게도 뭔가를 많이 남기고 갔다. 그것은 ‘늙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경외감이었다.

 

그렇게 살 수 있다면, 늙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감정. 지하철에서 만난 노인은 스승이었다. 말 없는 스승. 가르침은 없었지만, 교훈은 진했다. 나는 다음 날부터 지하철에서 조금 더 천천히 움직이고, 창밖을 조금 더 오래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쩌면, 나도 누군가의 옆자리가 되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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