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약자석에서 마주한 나이와 삶의 무게
빈자리보다 무거운 자리
지하철을 타면, 사람들은 자리를 찾는다. 서 있기보단 앉는 게 낫고, 앉는 것보단 편안한 자리가 좋다. 그런 면에서 노약자석은 특이한 자리다. 비어 있어도 쉽게 앉을 수 없고, 앉아 있어도 마음이 가볍지 않다.
그 자리는, 사실은 ‘가장 무거운 자리’다. 단지 앉는 것 이상의 의미가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어 있는 것 같지만, 결코 비어 있지 않다
한 번쯤은 다들 봤을 것이다. 노약자석이 한 자리 비어 있는데도 사람들이 그 앞에 서서도 앉지 않는 풍경. 그 자리는 겉으로는 ‘비어’ 있지만 속으로는 이미 가득 차 있다.
누군가의 아픔, 누군가의 세월, 그리고 누군가의 마지막 이동 경로. 그런 것들이 그 자리 위에 쌓여 있다.
나는 그 자리에 앉을 때마다 마치 오래된 책장에 앉는 느낌을 받는다. 겉은 조용하지만 속엔 수많은 사연이 눌어 있는 곳.
무게를 느끼는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처음 노약자석에 앉았을 땐 허리와 무릎이 분명 편해졌다. 하지만 마음은 오히려 더 무거워졌다.
그건 단순히 사회적 시선 때문만이 아니다. 이 자리가 나에게 부여하는 정체성 때문이다. 이 자리에 앉았다는 사실이 ‘나는 더 이상 젊지 않다’는 것을 몸이 아닌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 자리의 무게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더 뚜렷해진다.
이 자리엔 수많은 시간의 잔상이 겹쳐 있다
노약자석이 가진 무게는 단지 ‘늙음’ 때문만이 아니다. 그 자리는 생의 마지막 몇 년을 반복해서 오가던 어르신들의 발자국이 녹아 있는 자리다.
병원에 가는 길,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 문득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지하철에 올라 잠시 앉았다가 다시 되돌아가는 노인의 발걸음.
그 모든 여정이 이 자리에 겹쳐 있다. 그걸 알고 앉는 사람은 절대 가볍게 앉을 수 없다.
앉았다는 것만으로 감정이 밀려온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다. 비어 있던 자리에 나의 시간이 새겨지고 있다.
그리고 그 순간, 예전에 이 자리에 앉아 있었을 누군가의 시간이 조용히 내 옆에 앉는다.
그게 바로 이 자리가 무거운 이유다. 지금 이 자리엔 두 사람의 시간이 겹쳐 앉아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무게를 이어받는다는 것
누군가의 삶을 직접 이어받는 일은 어렵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자리에 앉는 것만으로도 나는 무언가를 계승하게 된 듯한 기분이 든다.
그건 젊음의 계승이 아니라 ‘삶의 무게’에 대한 계승이다.
그들이 견뎌낸 세월, 그들이 겪은 노화, 그들이 조용히 흘러간 하루들.
그 모든 것을 잠시 내가 이어받는 느낌. 그게 이 자리에 앉는 순간 피어나는 감정이다.
다음엔 또 누가 이 자리에 앉을까
나는 언젠가 이 자리를 떠나게 될 것이다. 더 이상 지하철을 타지 않게 되는 날이 오겠지. 그리고 누군가가 나처럼 조심스레 이 자리에 앉을 것이다.
그 사람도 나처럼 이 자리가 무겁게 느껴질까. 혹은 더는 아무런 의미 없이 앉게 될까.
나는 바란다. 이 자리가 무겁게 느껴지는 사람이 조금 더 많기를.
그것이, 사람이 남긴 시간에 대한 예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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